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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 시니어 스토리] “세계 최고의 시설서 훌륭한 공연 선사해요”

한인 사회보다 홈리스들에게 훨씬 유명한 사람이 울타리 선교회 대표인 나주옥 목사다. 나 목사는 ‘에스더 나’라는 영어 이름보다 홈리스 세계에선 ‘홈리스들의 마마’, ‘도넛 레이디’로 더 알려져 있다. 알게 모르게 LA의 홈리스를 먹여 살리고 있는 나주옥 목사를 만났다. 나 목사의 박사 학위 논문 주제가 ‘홈리스’였다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나주옥(사진) 목사는 1944년생이고 올해로 팔순이다. 나주옥 목사가 이끌고 있는 울타리선교회가 진행하고 있는 홈리스 구호사역을 들어보면, 그의 꾸준함과 사고의 전환에 누구나 감탄하게 된다. 그가 미국에 유학온 것이 40세가 훨씬 넘었기에 막상 목사 안수를 받은 나이는 55세나 된다. 한국으로 치면 직장 생활을 하다가 은퇴할 나이라서 그의 표현대로 늦깎이다. 그래서 목사 안수식은 1999년 2월에 열었지만, 그는 교회를 개척하거나 기존 교회에서 들어가 목회를 하지도 않았다.     1999년 7월12일 선교단체로 울타리선교회를 열었다. 다만 일반인을 상대로 하는 선교회가 아니고 불쌍하고 가난한 홈리스를 위해서 시작했다. 울타리 선교회를 시작하고 초점을 두었던 사역은 현실적으로 홈리스를 돕는 것이다. 하지만 작은 단체라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배고픈 홈리스의 고통을 어느 정도 해결해 줄 수 있지 않을까.'   먹을 게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이 바로 홈리스들이다. 단어 그대로 홈리스는 집이 없으니 부엌도 없고 냉장고도 없다. 바로 먹을 것만 필요하고 냉장-냉동된 음식 재료는 쓸 데가 없다. 그래서 집이 있는 사람과 달리 그날 먹을 식품을 구하는 것이 일상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다'는 얘기가 있듯이 홈리스는 '하루 얻어 하루 먹는다'. 미국에겐 잉여식품이 많다. 멀쩡한 음식인데도 생산업자가 유통기한에 근접하면 과감하게 폐기한다. 나주옥 목사는 이 점에 착안했다. 잉여 식품을 대신 받아서 배고픈 홈리스들에게 나눠 주고자 했다.     첫 사역은 라면 사역이었다. 나 목사는 농심지사에 찾아갔다. 다운타운에 있는 홈리스들에게 사발면(컵라면)을 나눠주고자 부탁했다. 하지만 라면은 워낙 수요가 많은 상품이고 며칠 둔다고 상하는 식품이 아니어서 돈을 주고 샀다. 일부 기부도 해줬지만 농심이 현지 라면 공장의 문을 열 때까지는 현금을 주고 도매가로 구입해서 다운타운 한 구석에서 물을 데워 라면을 나눠줬다. 물론 라면 구입 비용은 후원자들이 도와서 가능했다. 매주 토요일마다 13년간을 하루에 150개씩 사발면을 나눴다.     두번째 사역은 진짜 잉여식품이 필요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넛인 '크리스피 도넛'이 잉여식품이 됐다. 이 도넛은 생산된 날까지만 판매하고 다음날에 모든 도넛을 폐기한다. 그래서 나 목사는 매니저를 설득해서 다음날 새벽에 전날 팔고 남은 도넛을 받아서 홈리스에게 나누기 시작했다. 2003년 1월부터 시작된 이 사역은 지금도 똑같이 진행되고 있다. 달라진 것은 매일 제공하던 도넛 회사가 다른 구호단체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해 울타리선교회에게는 주3회로 줄었을 뿐이다. 한번에 150더즌을 받는다.   나 목사는 "처음에는 잉여식품을 받으러 가거나 요청할 때 조금 주눅이 들었다. 돈을 내지 않고 받아 오는 것이 민망했던 것"이라며 "하지만 마음을 고쳐 먹고 당당해졌다"고 밝혔다.   "만약에 그들이 주는 많은 도넛을 내가 먹거나 되판다면 주눅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홈리스의 식량 사냥을 줄일 수 있는 좋은 먹거리인데 그만 둘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먹어봐야 하루에 한 더즌을 먹을 수도 없고 뒀다가 먹을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도넛을 받아다가 배달하는 사역을 하다 보니 사람들에게 진심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홈리스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의 건강을 걱정해주고 그에게 마더스데이 카드를 전달해 주는 홈리스도 생겨났다. 또한 교회는 개척할 수 없을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목회를 시작할 수 있었다. 바로 2007년 2월부터 한인타운 애덤스 길의 오래된 교회를 빌려 홈리스를 대상으로 한 '울타리선교교회'를 시작했다.     나 목사는 "아이러니 하게도 목회는 못할 것이라고 항상 생각했는데 도넛 분배를 계속하면서 홈리스들에게도 그들만의 교회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그들이 우리 교회라고 부르면서 매주 토요일마다 예배를 보는 교회를 개척했다"고 밝혔다.   이렇게 잉여식품을 나눠주기 위해서 매일 새벽에 일어나고 하루 종일 음식을 실어 나르는 와중에도 나 목사는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에서 교역한 석사 학위를 받은지 20년만인 2019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에서 '홈리스에 대한 연구'로 박사가 됐다. 이제까지 홈리스를 구호하겠다는 사람이나 단체는 많았지만 그들을 학문적으로 연구한 경우가 많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나주옥 목사는 흔하지 않은 '홈리스' 박사가 된 것이다.   나 주옥 목사가 한인사회에서 유명해진 것은 크리스피 도넛으로 인한 것이 아니고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에서 기금 모금 음악회를  개최하기 때문이다.   울타리선교회가 오는 21일  오후7시 다운타운 월트디즈니 콘서트홀에서 제 25회 연례 기금 모금 음악회를 개최한다. 울타리선교회에서 월트디즈니에서 갖는 7번째 음악회로 올해도 지휘자 김용제 씨가 음악 감독을 맡아 한인들에게 좋은 음악을 선사한다.   나주옥 목사는 "홈리스 구호를 위해서 많은 후원과 기부를 받았는데 울타리선교회에서 마땅히 보답할 길이 없었다"면서 "이왕 모금 음악회를 개최한다면 수억 달러를 들여 건축해서 객석 어디에서나 똑같은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훌륭한 장소에서 공연을 선사하고 싶었다"고 이번 음악회 개최에 대한 취지를 설명했다.   나 목사는 "그동안 디즈니홀에서 음악회를 개최할 때마다 한인타운에서 개최하면 대관료가 절약돼서 더 많은 기금을 모을 수 있지 않겠냐는 얘기를 들었다"며 "하지만 가장 좋은 음악 시설에서 수준 있는 음악을 선사하고 싶었다. 또한 한인타운에서 개최할 때보다 경비가 더 들어가는 것은 맞지만 더 많은 기금을 모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후원 문의: (213)819-3300 장병희 기자리얼 시니어 스토리 선사 공연 목사 안수식 홈리스 세계 홈리스 구호사역

2024-06-30

[리얼 시니어 스토리] 중소기업 경영합리화 위해 한국 첫 MBA 도입

한인 올드타이머들이 한인타운 건설에 큰 공로가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나중에 이민와서 이들이 만들어 놓은 타운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은 조금 민망한 일이다. 터전을 좀 더 서쪽에 했으면 좋았다거나 더 북쪽으로 했으면 좋았겠다는 불만도 있다. 하지만 지금 자리가 최적이었다는 얘기도 들린다. 하여튼 역사의 한순간에 있었던 한인 올드타이머 중 한 사람인 이재권 미주 박정희대통령 기념사업회장을 만났다.   이재권 회장은 서울대 행정학과 56학번이다. 4.19가 지난 1961년2월에 졸업했다. 운이 좋아서 1년 반 짜리 군대를 다녀왔다. 법관시험도 봤지만 하늘에 뜻에 따라 떨어졌고 이듬해 있었던 공무원 시험에서 공무원이 됐다.   "성적이 좋으면 희망 부서로 보내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상공부를 희망했습니다."   상공부에는 2명이 배정됐고 청년 이재권은 중소기업과로 발령이 났다. 당시 중소기업 육성을 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품은 중소기업과는 협동조합법을 제정했다. 그 다음 중소기업 경영합리화 작업이 필요했다.   "그 옛날에는 전부 주먹구구로 했잖아요. 첫 데이터도 없고 주먹구구로 했는데 경영 합리화 시켜야 되겠다는 것이 상공부의 주요 과제였습니다."   청년 공무원 이재권은 미국식 MBA(경영학석사)과정에 착안했다. 당시에는 상학과는 있었지만 경영학과, 경영이라는 단어조차 없던 시절이다. 학부보다는 대학원에서 운영해야 하는데 이 회장이 졸업한 서울대 보다는 당시에 기업경영연구소를 운영하던 고려대가 알맞은 것같았다. 고려대 측은 처음에는 상공부의 권유에도 고사했다. 청년 공무원 이재권은 정부 지원금을 줄이겠다고 으름짱을 놨다. 지원금을 몰아주기로 약속했다. 다행히 설득은 통했고 연구 과정을 시작했다. 한국에서 첫 MBA과정의 시작이다.     "대학 측은 등록학생이 아무도 없어서 망할까봐 두려워했던 겁니다."   이재권은 첫 학생으로 자원했다. 이 회장이 고려대 교우인 이유다. 당시 MBA가 무엇인지 잘 모를 때니 학생 모집이 쉬울 리가 없다고 예상하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학교 측에 20명을 보장하고 시작했다. 막상 프로그램을 알리니 학생이 160명이 등록했다. 비록 연구 과정이었지만 5.16이후라서 군대에서 정부로 넘어온 군출신들이 대거 등록했다. 이듬해부터는 서울대, 연세대도 과정이 개설됐다. 어차피 때가 되면 MBA과정이 개설되겠지만 청년 공무원 이재권이 1호 학생이 되면서까지 강권했던 덕분에 그 시기가 당겨졌고 이후 경제 발전에 큰 도움이 됐을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에서 3곳의 '인기 있는 과'가 있었다고 한다. 재무부에서 은행을 관리하던 과, 내무부에서 행정을 관리하던 과, 나머지 하나는 상공부에서 수입을 관장하는 수입과다. 이 회장은 법무관실을 거쳐 수입과에 들어가 과장까지 했다. 외화가 부족하던 시절이니 모든 수입은 상공부 수입과의 승인을 거쳐야 가능했다. 외국산 제품을 수입만 제대로 해도 사업이 되던 시절이므로 수입 승인은 정말 중요한 과정이었다. 당연히 유혹도 많았을 것이다. 언제나 공무원들은 부패의 꼬리를 달고 사는데 그렇지 않은 공무원들은 그 것이 또 어려움이다.   한번은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는 중장비 수입과 관련해 몇 달이 걸리는 승인을 하루만에 해결했다. 국가적인 사업이므로 담당자인 청년 공무원 이재권은 앞장서서 처리했던 것, 그런데 수 개월 후 중앙정보부 남산으로 불려갔다. 새벽부터 오후 8시까지 긴 조사 끝에 사무실로 돌아왔다. 당시 차관, 장관했던 박충훈씨는 이런 청년 공무원 이재권을 눈여겨 봤음은 나중에 알게 됐다.   결국 이민 온 처가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 왔다. 많은 사람이 계속 다녔으면 최소한 국장이나 차관보 이상을 했을 터인데 왜 그만뒀냐는 질문을 많이 해온다고 한다.   1970년 수출진흥과에서 오사카 엑스포를 참가해 수출 진흥을 위해서 총력전을 펼 때였다. 여러 유관부처를 팀장으로 진행했다. 하지만 실무 책임자인 청년 공무원 이재권은 행사를 마칠 때까지 묶어두고 엑스포가 끝나서야 한달짜리 휴가를 내줬다. 이민에 앞서 큰 계기는 3개월 짜리 호주 연수 덕이었다. 세상을 크게 보는 큰 시야를 갖게 됐다. 특히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아웅다웅 할게 뭐가 있냐는 생각이 들어 의무 근무 연한인 3년을 끝으로 바로 사표를 냈다.   1973년에 미국으로 왔다. 사표 수리가 안됐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왔다. 마침 무역회사 주재원이 돼 해외 수출을 위해서 일했다. 무역회사가 문을 닫고 부동산 브로커로 변신했다. 거의 50년이 됐기에 같은 시절 부동산 브로커를 했던 사람들이 모두 타계하여 현재 액티브한 한인 최고령 부동산 라이선스 소지자가 됐다.   LA한인사회가 LA한인회관을 구하려고 하는데 돈이 없었다. 그때 마침 무역협회장이 예전에 상공부 장관으로 모셨던 박충훈 전 대통령 권한대행이 LA를 방문했다. LA에서 만난 예전의 상사는 그를 기억하고 그의 한인회관 역할론과 중요성에 대해서 듣고 박 대통령의 결심에 힘을 보탰다. 결국 박 대통령이 5만달러, 무역협회가 10만달러를 냈고 그때까지 모았던 일부 자금과 융자로 30만 달러짜리 한인회관을 세울 수 있었다. 청년 공무원 이재권의 청렴결백과 신뢰가 LA한인 회관을 세우는데 일조했다는 것이다.   2004년 드디어 은퇴를 했다. 자녀가 어렸을 때 캠핑을 좋아했는데 이것이 좋은 기억으로 남았는지 마침 매물로 나온 여행용 RV가 캠핑할 수 있는 RV파크를 샀다.  LA한인타운에서 북쪽으로 1시간 40분거리에 있는 피라미드 레이크 인근이다. 175에이커나 되는 곳에 121곳의 사이트를 갖고 있다. 클럽하우스와 수영장, 배구장, 농구장, 세탁 시설 등이 완비돼 있다. 일종의 리조트 성격으로 캐빈도 있다. 팬데믹 전에는 윤동주 문학의 밤 행사를 17년간 개최했다.   이 회장은 또한 한국과 협력해 미국에서 탈북자 난민신청법 캠페인을 펼쳐 북한인권법을 통과시켰다. 북한 탈북자를 말만이 아닌 실제로 도운 인물이다.   2017년 박정희 대통령 탄신 100주년을 맞아 미주 박정희 대통령 기념 사업회를 시작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5천년의 가난을 벗게 해준 대통령입니다. 기념 우표를 비롯해 기념 사업이 많았는데 마침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모두 취소했죠. 그래서 민간 차원에서 시작하게 된 겁니다."   뜻이 맞는 몇 사람과 시작했지만 해마다 5.16과 11.14(박대통령 생일)를 기본으로 2번의 행사를 개최하며 박정희 대통령을 추모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미 전역의 한인 인사들이 참가해 '박정희 역사 탐방'이라는 프로그램으로 박 대통령과 관련된 생가, 묘지, 기념관 등 18곳을 방문하는 행사를 6일에 걸쳐서 갖기도 했다. 그는 온갖 이권을 놓고 다툼했던 정치권을 바로 앞에서 봤기 때문에 더욱 청렴하고 사심이  없었던 박 대통령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됐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장병희 기자리얼 시니어 스토리 북한 경영합리화 청년 공무원 청년 이재권 이재권 회장

2024-06-02

[리얼 시니어 스토리] ‘은퇴는 남얘기’ 무주에 연수원 짓고 희망 나눠

시니어라는 나이대는 대부분 은퇴자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꼭 그렇지도 않다는 것을 스티브 김 꿈희망미래재단 이사장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우리는 세상에 시니어가 돼서야 훌륭한 업적을,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준 비즈니스를 일군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너무 많아서 오히려 젊은 시절 성공한 사람을 기억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측면에서 스티브 김 이사장은 젊은 시절 사업도 성공하고 시니어가 되어서도 젊은 시절의 성공이 결코 행운이나 누군가의 큰 도움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고 그의 실력과 능력이 원동력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한인사회에서 유명한 골프장을 성공적으로 운영한데 이어 가족을 위한 패밀리 리조트, 이번에는 한국에서 주목을 끌만한 일을 벌였다. 혹시라도 지루하게 살고 있을 지 모를 시니어 동료 시민들의 영감을 일깨우고 있다.   '아시아의 빌 게이츠'로 불렸던 벤처기업가 스티브 김(74·사진) 꿈희망미래재단 이사장이 골프장 사업에 이어 호텔사업에 뛰어든 것이 엊그제 같은데 그새 한국 무주에서 또다른 프로젝트로 주목을 끌고 있다.     1990년대 벤처기업 자일랜사를 프랑스 기업에 매각하고 2007년 한국으로 돌아갔던 김 이사장이 샌타클라리타 지역의 36홀 골프장을 인수한 것은 2017년이다. 공동 투자자들이 사업성이 없다고 물러나면서 홀로 경영에 나서게 된 것이다. 당시 물부족으로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우물을 파고 36홀에서 9개홀을 줄이는 등 허리띠를 졸라매며 경영에 나섰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를 통해 폐쇄한 9홀 자리에 호텔을 짓는 아이디어를 실행한 것. 이는 벤처기업가로 명성이 자자했던 스티브 김 이사장의 저변에 깔려 있던 혁신의 혼이 일깨워진 결과였다.     김 이사장은 호텔 건축을 벤처기업처럼 시작했다. 우선 건축설계를 업체에 맡기지 않고 윌셔에 '원스톱디자인'이라는 또 다른 벤처기업을 세웠다. 컴퓨터 디자인에 능한 고수를 영입해 '명소 만들기' 작업에 나섰다. 그가 한국과 미국에서 공학을 전공한 엔지니어였기에 남들과는 다른 설계가 가능했다. 그가 의사결정에 직접 나서 복도의 높이, 문짝의 길이와 모양, 온갖 가구들을 정했고 이는 3D그림으로 화면을 가득 채웠다.   호텔은 380개의 객실과 이중 50~60개는 빌라를 갖춘 곳이다. 호텔방이지만 카지노를 위한 라스베이거스식의 한 칸짜리 방이 아니고 가족 휴식이 가능한, 리조트에 맞는 450스퀘어피트 정도 되는 규모다. 하지만 알려졌다시피 샌타클라리타 시정부가 그의 계획안을 거부했다. 적법한 절차를 밟았는데도 막았다. 자기 땅에 정식 허가를 내서 제대로 짓겠다는데 시정부가 막아선 것이다. 당시 시정부를 상대로 2억5000만 달러 소송을 제기한 이유다.  큰 장애물을 만났지만 베테랑 벤처기업가인 스티브 김 이사장은 달랐다. 그가 벤처기업가로 많은 칭송을 받았던 점은 첫번째 벤처와 두번째 벤처를 경영하면서 총 15년 60분기 동안 항상 이익을 냈다는 것이다.  김 이사장은 다른 대안을 찾았다. 건축 팀원들과 미팅에서 나온 아이디어, 즉, 기존 설계를 바탕으로 다른 곳에 짓는 것을 고려했다. 마침 와이너리로 유명한 테미큘라 지역에 좋은 땅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지역 정부와 접촉해 그들이 원하는 사양을 기존 계획에 맞췄다. 샌타클라리타 1호점은 소송까지 가고 있지만 테미큘라 2호점은 2024년 5월 청문회를 거쳐 곧 삽을 뜰 계획이다.     2호점 착공이 예상보다 늦어지는 사이 김 이사장은 의료 검진을 받으러 한국에 갔다가 자신이 세운 꿈희망드림재단을 위한 연수원을 짓기로 결정했다. 팬데믹으로 한국에서 리더십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왔던 것이 아쉬웠는데 다른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이다. 미국에서 호텔과 리조트를 짓기 위해서 준비했던 것을 바로 쓸 수 있게 됐다. 자신이 세운 건축설계 사무소의 3번째 작품으로 연수원을 짓게 된 것.     "서울에 마땅한 땅이 없어서 전국의 폐교를 조사했더니 37곳이 나왔습니다. 무주에 3천평짜리 폐교터가 있어서 허가를 받아 지난 1월부터 짓기 시작했습니다."   전국에 있는 폐교의 현황을 파악하던 중 마침 전북 무주군에 10년 전에 폐교됐고 현재는 무주군에서 소유하고 있던 부지를 발견했다. 2023년 6월, 군수와의 면담을 통해 계획을 전달하자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미국으로 돌아와 구체적인 설계와 사업계획서를 만들어 무주군에 제출했다. 무주는 처음 가본 곳이지만 재단이 찾은 부지는 고속도로에서 내리면 5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무주 구천동으로 유명한 무주는 산과 강이 어울어진 곳으로 해마다 3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춘 곳임도 새롭게 알았다.     덕유산에 이미 조성된 무주스키장은 오래 전 동계유니버시아드 대회를 통해 널리 알려졌고 매년 9월에 열리는 반딧불 축제에는 4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전국에서 몰려온다. 가을 단풍을 보기위한 등산객들을 포함해서 사계절 내내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다. 이곳에 테미큘라 리조트와 같은 160개의 객실과 큰 부페 레스토랑, 10개의 교실, 큰 행사장을 갖춘 지상 4층 규모의 연면적 4000평에 달하는 연수원이 들어선다.     청소년들이 리더십 교육을 받고 호텔 수준의 시설에서 머물며 맛있는 음식을 먹게 한다는 것이다. 또한 교사, 공무원, 중소기업 등의 직원들이 워크샵을 위해 머물며 휴식과 재생산을 통한 좋은 추억을 남길 것을 기대한다. 대규모 행사장에서는 지역 주민들을 초대한 음악회, 공연 및 강연 등을 수시로 개최할 수 있다. 1호점이나 2호점은 건축이 끝나는 대로 전문 경영인들에게 맡겨 운영할 계획이다. 그러나 3호점인 무주 연수원은 재단이 직접 나서서 다양한 컨텐츠를 개발하고 구체적인 부분에 참여함으로써 훨씬 의미있고 좋은 사업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무주 드림센터는 수익창출이 우선이 아니라 이곳을 찾는 사람들 누구나 비용대비 만족도를 극대화하고 다시 찾고 싶은 명소로 만드는 것이 목표다.     특히 이전에는 재단의 교육프로그램을 위해서 강사들이 전국 이곳 저곳을 다녀야 했지만 연수원이 완성되면 전국에서 모인 학생들이 2박3일간 숙식을 같이 하면서 꿈과 희망, 미래를 함께 그리게 된다.   이번 프로젝트에는 1000만달러가 훨씬 넘게 들어간다. 이전에 재단에 출연해 놓은 자산의 투자 이익이 건설비용을 상당수 충당하고 있다. 김 이사장은 재단을 통해서 매년 200만달러씩을 사용했는데 연수원에서 손익분기점만 맞추면 현상유지가 계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재단이나 갖고 있는 자산을 죽기전에 좋은 곳에 쓰게 됐다"면서 "많은 사람이 싸고 행복하게 사용할 수 있는 시설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연수원 건축은 10월말에 완공될 것으로 보이지만 테미큘라 2호점, 샌타클라리다 1호점도 포기하지 않았다. 원래 벤처기업들이 기존의 법제와 관습, 관행을 뚫고 극복해서 이뤄내는 것처럼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뼈속까지 벤처기업가인 스티브 김 이사장은 꼭 이뤄낼 것을 자신했다. 장병희 기자리얼 시니어 스토리 미국 남얘기 꿈희망미래재단 이사장 베테랑 벤처기업가인 벤처기업가로 명성

2024-05-05

[리얼 시니어 스토리] '공부하면 모두 해결될 것'이란 환상 깨야

지난 1월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2024에 한국의 많은 스타트업이 참가해 화제가 됐다. 그만큼 스타트업의 열기가 엄청나다는 얘기다. 중요한 자원도 없고 특별한 기술도 많지 않은 한국이지만 인적 자원이 풍부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스타트업 세상에 한 몫을 하고 있다. 미주에 거주하는 한국계 인재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미 전역 곳곳에서 스타트업으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열심히 뛰고 있다. 이들을 돕는 유명한 멘토가 한기용(UpZen 대표ㆍ55)씨다. 그가 최근 자신의 경험을 한 권의 책으로 내놨다. 스타트업을 2개나 성공시킨 그의 스토리는 관심을 끌고 있다. 이제 막 시니어가 돼 은퇴는 이르지만 2모작에 나선 그의 스토리를 들어봤다.     실리콘밸리에 거주하며 주류 사회에서 스타트업 멘토로 활약하고 있는 커리어 코칭 기업인 업젠의 한기용 대표가 지난 2월 '실패는 나침반이다'(부제 50대 개발자의 실리콘밸리 회고록)라는 책을 한국에서 출간했다. 지난 30년 간 스타트업계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동안 써온 글을 정리했다. 멘토가 많지 않은 한국 스타트업 분야에서 많이 읽히는 책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는 스타트업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이론까지 겸비한 잘 알려진 멘토다. 그에게 멘토링을 요청하는 사람들은 굳이 IT업계가 아니어도 매우 다양하다고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직장인들의 SNS인 링크드인(linkedin.com/in/keeyonghan/)에서 '멘토링 이야기'라는 100회짜리 연재 글을 시작해서 여기저기서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실제 멘토로 멘티그룹을 지도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전공을 살려 데이터 엔지니어링 라이브 강의도 했다.     가만히 그의 얘기를 듣다 보면 90년대 초반 한국의 IT업계는 물론 이후 미국의 IT업계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이해가 된다. 또한 그의 데이타베이스 하둡에 관한 책은 대학 전공 교과서가 될 정도였다는 사실도 인상적이다.     한기용 대표가 서울대에 입학한 해는 1989년이다. 당시에는 의예과, 물리학과, 컴퓨터공학과 등 세 학과가 이과계열에서 톱을 다투던 시절이다. 의대에 가라는 부모의 뜻을 거스르며 재수 끝에 컴퓨터 공학과에 입학했다.     "관심도 없는 의대를 가지 않은 것이 개인적으로 다행이었습니다. 사실 학교보다 일을 하면서 더 많은 것을 배웠으니까요. 다른 분야도 모두 그렇습니다."   오히려 2학년에 시작한 아르바이트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웠다. 우연한 기회에 대학원 박사과정 연구실에 드나들면서 업계에서 실무 경험을 갖고 학위를 위해서 돌아온 선배들과 컴퓨터 바이오스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배운 것이 많았다. 선배들의 박사 논문 주제인 인공신경망을 익혔고 영문 윈도에서 구동되는 한글 워드프로세서 개발에도 참여했다. 결국 이것이 인연이 돼 서울대 석사 과정에 진학했고 거기서 윈도 프로그래밍을 개발하다가 삼성전자까지 취직해 5년을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했다. 병역도 특례로 마쳤다.   지금도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나 대기업을 다닌다면 1등 신랑감이라서 주위의 부러움을 살만한 데도 그는 꼭 좋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돌아간다면 7년을 낭비하지 않고 다른 선택을 했을 지도 모른다"면서 "미국에 빨리 왔거나 중소기업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멘티들과 나누는 조언은 이런 경험에서 나온다.     '대기업이 네 커리어를 완성시켜줄 것이라 생각하지 말아라.'   그의 조언은 계속된다. '네가 도대체 원하는 게 뭐냐'라고 묻는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안전한 선택을 강요 받는다는 것이 그의 이론이다. 이는 기성세대가 저지르는 잘못이라고 규정했다. 필요하지도 않은 공부를 어렸을 때부터 차세대에게 시키는데 결과적으로 젊은이들이 무조건 모든 것을 공부로 해결하려는 습관이 든다는 것이다. 무언가 막히면 공부가 필요하다고 판단한다는 뜻이다.   "멘토링을 하면 첫 번째 질문이 무엇을 공부하면 미래가 준비가 되냐고 물어옵니다. 그런데 세상이 항상 공부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고 수능이나 학력고사처럼 주제와 과정이 정해진 것도 아니고 시험 날짜가 정해진 것도 아니죠. 또한 성공한다고 해서 인생의 행복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요즘 젊은이들은 대부분 시험 공부하듯이 몇 년간 취업 준비해서 네이버나 삼성전자에 갈 수 있고 그러면 자신의  커리어가 완성될 것이라는 판단을 한다는 것이 아쉽다고 덧붙였다.     한 대표는 "기성세대가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데 한 단계 더 나가면 결국 의사가 되면 된다고 결론 짓기 쉽다"며 "간혹 40대 중반인 똑똑한 의사나 변호사들로부터 멘토링 신청을 받는다. 자신들이 해보니까 재미가 없고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어서 크게 방황한다"고 설명했다. 결국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한번도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현장 교육이 문제라는  결론이다.   한 대표도 31세에 미국에 왔는데 처음에는 이런 마인드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고생했다고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미국은 다양성이 있고 질문을 장려한다는 것은 수평적인 관계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에 도착한 후 작은 회사 중심으로 '남의 행복 신경 쓰지 말고 내가 원하는 거 하면서 살자'는 생각으로 일했고 2곳의 스타트업 성공에 참여할 수 있었다. 한 곳은 폴리보어(Polyvore)로 야후에 M&A로 팔렸고 다른 한 곳은 온라인 강의 사이트인 유데미(udemy)로 나스닥에 상장됐다. 물론 그 전에 참여했던 스타트업 3곳은 망했는데 그래서 안목도 생기고 결국은 확률 싸움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덧붙였다.     "5곳의 스타트업에서 일해보니 계속해서 도전하는 게 중요하고, 결국은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사람과 문화가 좋은 회사를 골라야 됩니다." 덕분에 40대 후반이 되면서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생겼고 정신적으로도 여유가 생겼다. 가진 경험을 후배들하고 공유해야겠다고 싶었고 특히 한인계들과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실리콘 밸리지역 한인 과학기술창업자 모임인 베이에어리어K그룹에 참여해 이사장까지 맡았다.  인생 후반기에 들어선 그는 이제 다른 의미의 2모작을 통해 또 다른 모멘텀을 보며 새로운 것을 찾고 있다. 지난해 12월까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1인 기업인 업젠을 창업했고 앞으로 10년이나 20년은 무엇을 하고 살아야 되는지 고민 중이다. 그의 커리어가 첫 10년은 윈도 프로그래밍, 다음 10년은 검색, 최근 10년은 데이터 일에 몰두했기에 이제까지 했던 것과는 다른 것을 해 볼 생각이다.  "사실 저는 꿈이 없던 사람입니다. 50세가 넘어서 생긴 꿈은 선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겁니다."   지금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한다. 일단은 누가 됐건 만난다. 그가 얻을 게 없는 것이 분명한 상황이라고 해도 예를 들어 한국에서 대학생이 와서 만나자고 해도 응한다. 사람이 괜찮고 이야기했을 때 무엇인가 배움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계속 만난다.     한 대표는 이미 IT분야에서 많은 책을 출간한 바 있다. 컴퓨터공학과 석사 과정을 밟으며 이미  비트교육센터에서 강의했는데 소프트웨어 지식을 쉽게 설명해 풀어가는 스킬이 이때부터 시작돼 삼성전자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하면서도 '비주얼 C++'과 '윈도우 프로그래밍'을 집필했다. 당시 방대한 윈도 프로그래밍 방법을 쉽고 간단하게 풀어쓴 덕분에 많은 컴퓨터 공학 관련 학부의 대표적인 교재로 채택되기도 했다. 이외 저서로 '한번 더 생각한 비주얼 C++와 MFC 프로그래밍 집필 (대림)', '한번 더 생각한 윈도우 프로그래밍 집필 (대림)', '클릭하세요 닷넷 API 프로그래밍 집필 (대림)', '프로그래머 그들만의 이야기 집필 (영진)', 'Do it! 직접 해보는 하둡 프로그래밍(이지스퍼블리싱)' 등이 있다.   장병희 기자리얼 시니어 스토리 공부 환상 한국 스타트업 스타트업 멘토 윈도 프로그래밍

2024-03-03

[리얼 시니어 스토리] 미국 성공 교훈 친지·후배에 알리려 자서전

"무엇을 해서 성공했다고? 이런 질문에 10분 이상을 설명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차라리 자서전을 하나 내는 것이 좋겠다고 권해서 시작한 일입니다."   남가주에서 고속필름처리 기계 제조업으로 큰 성공을 거둔 이명선 '휴스터 피어리스76' 이사장이 지난 10월 자신의 자서전 '성실: 아메리칸 드림의 여정(Sincerity)'을 출간하게 된 이유다. 현재 이 자서전은 한국의 유명 온라인 오프라인 서점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자서전 출간은 그의 성공에 대한 자랑을 위해서가 아니다. 쉽게 설명해서 자신의 성공 비결을 지인들과 후배들에게 남기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동문은 자서전을 통해 자신의 성공 비결로 독자들에게 '성실'과 '진실'을 전달한다. 그는 "미국에선 특히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며 "적당히 하려 하기보단, 진실되게 대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은퇴 후 서울을 자주 방문하다 보니 고교 동기나 지인들의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 등 떠밀려 시작한 일이지만 무사히 마무리돼 책으로 세상에 나온 것이다. 모교 행사인 '서울고 졸업 65주년' 모임에 배포하기 위해서 4월 말부터 시작해 서너달이 걸렸다. 지난 10월 150여명의 동기들에게 나눠줬다. 평소에 틈틈이 정리했던 것을 소개하니 고교 동기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심지어 밤을 새워서 읽었다는 친구도 나왔다.     이런 호응은 사실 예상됐는지도 모른다. 당초 '자비 출판'으로 출간을 맡은 출판사에서 대표가 직접 전화 연락을 해왔기 때문이다. 원래 친구들과 친지, 후배들에게 전달할 요량으로 시작한 출간에 뜻밖에도 출판사가 일반 출판을 하자는 것이다. 책 편집을 맡은 편집자가 작업을 하다가 감동했고 이런 훌륭한 내용은 일반 독자들에게 꼭 전달해야 한다고 적극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는 "책이 생각보다 두꺼워요. 진실과 진심을 담다가 보니 길어져서 출판사에서 나중에 80페이지를 줄였을 정도"라며 "어린 시절 연애 얘기도 들어 있는 등 세세하게 진짜 심혈을 기울여 작업했던 것이 이런 반응을 얻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유학 초기 가난을 버텼던 시절부터 34년간 회사를 경영하던 시기에 걸쳐  기록된 에피소드들도 수록됐다. 그는 6.25전쟁에 참전했던 미국인을 회사에 고용해 그 부부의 결혼기념일을 챙겨준 일화도 잊을 수 없다고 전했다.   물론 책을 쓰는 것이 전문이 아니므로 남가주에서 활동하는 작가와 협업한 것이 주효했다. 작가는 그의 정리 안된 글을 줄기부터 정리해 줬고 문법, 맞춤법까지 도와줬다고 덧붙였다.   39년생인 이 이사장은 이미 은퇴한 상태다. 회사에는 한달에 한 두번 방문하고 있다. 골프는 진심이어서 매주 3~4번 라운딩하며 피트니스에서 땀도 흘려 건강을 챙기고 있다.     그의 버켓리스트는 구체적이다. 골프 성지로 발상지로 불리는 스코틀랜드의 세인트 앤드류스 골프코스에서 라운딩했고 남극, 크루즈로 104일간 세계일주를 하기도 했다. 아울러 세계 3대 폭포인 이과수(남미), 나이애가라(미국), 빅토리아(아프리카)를 모두 방문했다. 애리조나 세도나에서 1만피트까지 올라가는 풍선 여행도 했다. 그는 "젊어서 10대 버켓리스트를 설정했는데 모두 완수했다"고 말했다. 부인 헬렌(1941년생)과 2남(제임스, 에드워드) 1녀(모니카)를 뒀다. 자녀들에게 그는 "공부도 잘했고 성공적으로 살고 있다"며 "비즈니스의 성공도 좋지만  성실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몇 년전 그가 80세가 넘어서 매각 오퍼를 많이 받은 적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 당시 젊은 CEO를 영입할지, 매각할지 고민했었는데 큰 아들 제임스가 승계하기로 스스로 결심해 기뻤다고 말했다.     한편 이제까지 3명의 보스를 만났고 매 순간 그들의 장점만을 배워 발전했다. 그 3명의 보스가 항상 고마웠다고 회상했다. 3번째 보스는 나중에 회사가 성장했을 때 은퇴한 그를 초빙해 프레지던트로 3년간 모셨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중2때 아메리칸 드림을 꿈꿨는데 그것들 모두를 실현시켰다"며 "앞만 보고 뛰었지만 크게 후회하는 일도 없다"고 말했다. 후배들에게는 "큰 세계관을 갖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며 "아메리칸 드림은 아직도 유효하다"고 덧붙였다.   이 이사장은 서울대 상대 상학과 58학번으로 1966년 미국 유학 길에 올라 USC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또한 MBA 취득 후 공대에서 컴퓨터 사이언스 석사를 받은 특이한 이력도 가지고 있다. 그는 특수 마이크로 필름과 고속현상기계 제조에 특화돼 있는 기계 제작 회사 '휴스턴 피어리스'를 인수해 '휴스턴 피어리스 76'를 설립했다. 원래 이 회사는 1930년대 억만장자 하워드 휴즈가 설립했으나 1970년대 부실화돼 매물로 나온 것을 이 이사장이 근무하다가 소액 투자로 인수해 오늘에 이른 것이다.     한편 그의 자서전 '성실'은 한인타운 반디서점(213-739-8107)에서 구입할 수 있다.     장병희 기자리얼 시니어 스토리 미국 자서전 자서전 성실 친지 후배들 성공 비결

2023-12-24

[리얼 시니어 스토리] "제 삶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은퇴한 내과 전문의이며 가톨릭 종신 부제인 김재동씨에게 올해는 특별하다. 지난 1943년 2월 16일 전북 순창, 지리산 입구 산골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만으로 80세가 됐고 1972년 뜻하지 않게 미국으로 와서 정착한 지도 50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그의 세 자녀가 마련한 '팔순 잔치'는 8명의 손주를 포함해 전 가족 16명이 함께 고국을 방문해  지난 4월 9일 54주년 결혼기념일에 서울 강남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열렸다.     그는 이제 80세인 시니어로, 은퇴한 의사, 또한 수필가, 가톨릭 교회 종신 부제(성직자)다.     "되돌아보면, 초등학교 1학년인 7살때 일어난 한국 동란으로 재산을 모두 잃고 인근 광주로 피난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하지만 5.16 장학생으로 학비 걱정 없이 의과 대학을 졸업하여 의사가 됐으며 미국까지 와서 40년간 위장 내과 개업의로 아픈 환자를 돌본 후 75세에 명예롭게 은퇴한 삶은 순전히 기적 같은 '하느님의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욱이 선배의 소개로 이화여대 미대 출신 부인 김수현씨는 만나 가정을 꾸린 것은 은총 중의 은총이었다고 전했다. 그는 "자연 과학을 공부한 단순하고 무미건조한 외골수 삶 속에서도 폭넓은 예술과 감성의 인문학이 접목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면서 "자연, 문학과 인간,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폭넓은 삶의 깨달음은 좋은 인생 반려자를 통해 주어진 축복이었다"고 덧붙였다.     덕분에 그는 바쁜 의사로 살면서도 문학에 열중해 책도 4권이나 출간했고 "하느님이 좋아" 가톨릭 부제로 살아온 복된 인생을 살 수 있었다.   이런 복된 결혼생활을 이웃에 전파하기 위해 최근 10여 년간 40대의 젊은 청춘을 ME(부부 사랑 운동)에 헌신할 수 있었고 후속 프로그램으로 결혼 적령기 자녀를 위한 배우자 찾기 캠페인 '청실홍실운동'도 정찬열(시인)씨와 주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닌게 인생이다. 이민자로 바쁘게 살다 보니 큰 아픔도 있다.     "이민자의 첫 자녀로 태어난 큰 아들이 긴 세월 동안 남모르게 고통과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한창 부모의 관심을 먹고 자라야 할 나이인 사춘기에 접한 약물로 수 년간 고생만 하다가 결국 펜타닐 과다 복용으로 최근 나이 50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많은 이민 가정에서 겪을 수 있는 고통이다. 다행히 큰 아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고 떠났기에 영혼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희망 하나가 큰 위안이 된다고 그는 말했다.     남은 둘째 아들과 두 딸은 큰 아들과의 '시행착오'를 통해 다행히 부모의 관심과 사랑 속에서 잘 자랐다. 둘째 아들은 내과의사가 돼 약사 배우자를 만나 두 자녀의 아빠가 됐다. 각각 카운셀러와 약사인 두 딸은 모두 하버드 의대 출신 의사 배우자들과 결혼해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부부의 일상은 5년전 은퇴 후 팔로스버디스로 이주하여 틈만 나면 바닷가를 거닐고 가끔 골프를 치며 건강에 힘쓰고 있다. 남은 인생을 좋은 친구들과 어울려 즐겁게 살고 있다. 은퇴 전에 비해서 시간이 많은 편이어서 읽지 못했던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있다. 세상과는 유튜브나 카톡으로 소통하고 있다.     버켓 리스트는 아니지만 그의 관심사는 큰 아들처럼 아픔을 겪고 있는 주위의 약물 중독자와 정신 질환을 겪고 있는 이웃과 함께 하기 위해 김영철 목사가 주도하는 '가족 정신 건강 센터'를 지원하는 일이다. 직접 겪은 아픔이기에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돕고 있다.   그는 사후에 맞이할 하늘나라의 영원한 '천상영복'에 마음을 두고 있다. 신앙은 그에게 단 하나의  꿈이며 생명이고 가슴 설레이는 희망이다. 그런 꿈이 있기에 노년 생활이 더 아름답게 여겨져 오늘도 행복하다.     "꿈과 비전이 있는 한 인생은 나이와 상관없이 언제나 가슴 설레는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장병희 기자리얼 시니어 스토리 하느님 은총 인간 하느님 가톨릭 부제 가톨릭 종신

2023-11-05

[리얼 시니어 스토리] "오를 산이 있어서 항상 행복했네"

50년이 넘는 한인타운 역사에는 다양한 업종과 분야에서 큰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 있다. 비단 경제계나 정치계  인사들만 그런 게 아니다. 특히 취미나 여가 선용 분야에서 김평식(1940년생) 에버그린 클럽 초대 회장의 영향은 실로 대단했다. 아마도 전무후무하다는 표현이 딱 맞다.   팬데믹 이전만 해도 남가주 한인사회에는 거의 20여개의 등산 클럽이 있었다. 한국에서 산마다 등산하는 인구가 넘쳤 듯이 남가주에도 등산 인구는 많았다. 다만 한국의 산과 달라서 어디를 어떻게 올라가야 할지, 누구를 믿고 가야 할 지 알 수 없었기에 한인들이 주축이 된 등산 클럽이 우후죽순 생겨났던 것이다.     이들 등산클럽의 고조선 같은 역할을 에버그린 클럽이 맡았다. '클럽주' 김 회장이 산을 좋아했고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좋아했기에 가능했다. 결국 한인들의 등산 문화를 세운 셈이다. 토요클럽, 일요클럽, 화요클럽이 구성돼 50인승 버스가 1주에 3번씩 출발했다. 매주 150명이 산을 찾았는데 얼마 안되는 것 같지만 선발 인원만 그런 것이지 실제 등록 회원은 500명이 훨씬 넘었다. 그래서 15인승 밴이 항상 필요할 만큼 차고 넘쳤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소송이 '잘 되던 비영리단체 등산클럽'의 발목을 잡았다. 결과는 좋게 끝났지만 상처는 컸다. 더 이상 행복하기가 어려웠던 김 회장이 물러나고 구심점을 잃은 클럽은 자연스럽게 1년만에 소유하고 있던 버스와 밴을 팔았고 수 년간 은행에 모아뒀던 회비도 조용히 사라졌다. '에버그린 클럽' 이후 여러 등산 클럽이 세워졌지만 대개 수 십명에 불과하다. 이는 마치 바이칼호부터 한반도까지 펼쳐졌던 고조선이 무너지고 한반도의 삼한시대가 도래한 것 같다.     김 회장은 현재 에버그린 클럽 때와는 다른 등산과 트레킹을 즐기고 있다. 회원들이 모두 움직일 수 있는 목적지일 필요가 없으므로 소규모로 '반갑다 친구야' 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한번 출발은 13명 정도로, 매주 3번 출발도 아니고 부정기적으로 한 달에 한 두번 정도 '김 회장'이 가고 싶은 곳을 간다. 에버그린클럽이 결국 사람을 믿지 못하게 했다면 자연은 특히 산은 항상 믿을 수 있기에 마음껏 찾는다. 최근엔 충청노인회 회원 60명과 가까운 샌타바버러를 인솔해 다녀오기도 했다.     등산 전문가로 '미국 50개 주 최고봉'을 방문하고 책까지 낸 바 있는 김 회장이 가고 싶은 곳은 어디였을까. 우선 대륙 횡단이다. LA에서 출발해 플로리다 키웨스트를 찾았다. 25일 코스로 미국 자연을 한껏 즐겼다. 종단도  LA를 출발해 시애틀을 15일만에 갔다 왔다. 보스턴으로 날아가 메인주 대서양에서 랍스터를 즐겼다. 조지아주로 가서 테네시 멤피스를 거쳐 블루리지 파크웨이를 돌아봤다. LA에서 회원들과 버스로 갈 수 없었던 곳이다. 멤피스에서는 세상에서 최고로 맛있다는 돼지갈비도 맛봤다.   그의 일상은 여느 팔순 시니어와 다르지 않다. 오전 5시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오전 7시쯤 운동을 한다. 에코파크 주위를 2바퀴 돈다. 유튜브에서 여행과 음악 동영상을 열심히 본다.     김 회장은 건설업, 제너럴 컨스트럭션(종합건설업) 라이선스를 갖고 있었다. 오래된 건물에서 나오는 비소를 취급할 수 있는 라이선스까지 갖고 있었다. 20년간 많은 돈을 벌었고 부동산 투자도 많이 했다.     '여행의 달인' 김평식 회장도 여행에 관한 버켓 리스트가 있다. 미국의 수많은 도시를 방문하면서 나중에 꼭 다시 와야지 했던 곳을 혼자 가볼 생각이다. 60년 넘게 지하 탄광이 불타고 있는 펜실베이니아의 '센트레일리아'도 다시 가볼 계획이다.   최근 아들이 큰 금융회사의 사장에서 회장이 됐다. 딸도 변호사로 크게 성공했다. 자녀들에 대한 큰 바람은 없고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건강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   기억에 남는, 고마웠던 순간은 바로 에버그린 클럽 버스를 살 때다. 매번 대여를 하느니 버스를 사는게 낫다고 해서 30만달러에 달하는 새 버스 비용을 내부에서 모았다. 6명이 5만달러를 내면 2년 후 원금을 돌려주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정말 6명이 돈을 모아왔다. 김 회장을 믿고 여행에 진심이었던 것이다.   김 회장은 "막상 30만불을 받고 보니 덜컥 겁이 났다"며 "각 5000불만 받고 나머지는 돌려주고 중고버스를 샀다"고 말했다. 지나고 보니 자신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대단했었는지 실감이 난다며 눈물을 흘렸다.   남기고 싶은 얘기가 있다. 바로 부동산 폭락 전, 1990년대 초반 가졌던 부동산이다.   "중앙일보 건물 옆 7가일대 땅이 모두 내 소유였죠. 그런데 내 재물이 아니라는 걸 내 손에서 떠나고 난 뒤에 알았고, 이제는 아깝거나 아쉽다거나 그런 것은 없어요. 그동안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았는데, 그냥 나를 지나간 것이지." 장병희 기자리얼 시니어 스토리 행복 에버그린클럽 비영리단체 등산클럽 에버그린클럽 초대 이들 등산클럽

2023-10-29

[리얼 시니어 스토리] 팬데믹…비즈니스 닫았지만 봉사 계기로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비즈니스를 닫을 수 밖에 없었지만 계기가 돼 봉사 활동에 더 진심인  사람이 바로 정종오 관장이다. 그는 1949년생이다. 두 아들을 함께 키운 부인은 지난 2010년에 별세했지만 그의 삶은 굳건하고 흔들림이 없다.   두 아들 모두 아버지와 같은 태권도인을 걷고 있다. 팬데믹 이전만 해도 LA에서 충효태권도라는 이름으로 도장을 운영했다. 큰 아들 민규는 한인타운에서 엘리트태권도센터로, 둘째 형수는 라팔마 충효태권도를 운영하고 있다. 정 관장은 이제 도장은 포기했지만 장소를 렌트해서 태권도를 계속 가르치고 있다. 월수금 오후 5시부터 1시간씩 태권도를 가르치며 건강을 지키고 있다. 원래 그는 태권도 사범으로 태권도를 통한 선교 활동을 원해서 1984년도에 충효태권도를 세우고 동시에 세계 선교 태권도협회를 창립했다. 이 협회를 통해 39년간 어려운 신학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했고 각종 선교단체에 선교 헌금을 전달했다.     또 다른 직업은 한의사다. 1986년 가주 한의사자격증을 따고 '약손한의원'을 개원해 어려운 한인 시니어들에게는 무료로 인술을 펼쳐왔다. 1991년 한의사협회 부회장 시절엔 가주 한의사 25명을 이끌고 중국 장춘 중의 대학에서 임상 실습을 다녀오기도 했다. 2021-2022년엔 가주 한인 한의사협회장을 맡기도 했고 이어서 미주 기독한의사 협회장으로도 봉사했다. 또 이민 오기 전에 일했던 대한항공 보안승무원 동료를 모아 1983년엔 모임도 만들어 역시 봉사 활동에 나서고 있다.     하루 일과는 주3회 새벽 그리피스 천문대로 올라가 정상 밟기를 한다. 1시간 걸리고 8000보쯤 걷는다. 이외 시간은 한인 사회의 각종 행사에 참석하고 봉사도 하고 봉사할 일을 찾기도 한다. 정 관장은 "할 일이 있는 것은 건강과 직결된다고 믿고 있다"며 "건강을 위해서 3개월마다 보약을 먹고 있는데 벌써 30번째 먹고 있어 보약의 힘으로 건강을 유지하는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버켓리스트가 아쉽다. 여행을 좋아하면서도 경제적인 한계 등으로 여행에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다. 기회를 만들어 캐나다와 미국 대륙 횡단, 남미 선교 여행을 마칠 계획이다. 건강하니 문제가 없다.     지난 4월 중순 기독한의사협회 회원 20여 명과 함께 키르키스탄을 방문해 3박 4일간 의료 선교 활동을 하고 돌아왔다. 귀국 길에 3박 4일간 튀르키에 성지순례도 가졌다. 튀르키에 선교사에게 지진 성금 5000달러도 전달했다. 앞으로 나바호 인디언 의료 선교를 계획 중이다.     도장을 운영하면 아무래도 매달 렌트 비용이 부담인데 클래스만 열고 있어 큰 부담이 없다. 그래서 10월부터 수요일 그룹 레슨을 시작하려고 한다. 그는 "오랜 기간 운영하던 도장을 코로나로 인해 닫아서 매우 섭섭했다"며 "하지만 지금 오히려 홀가분하고 좀 가볍게 살고 있다"고 덧붙였다. 남은 인생도 봉사하며 남을 도우며 행복하게 살라는 하나님의 배려라고 믿고 있다.   두 아들에게 바라는 것은 하나님 믿고 사회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것. 항상 기도하고 있다.   한편 정 관장은 "우연히 제가 바람둥이라는 소문을 직접 들었다"며 "아마도 학부모나 여성 환자로부터 감사의 점심 대접을 받을 때가 있다. 사양하기 어려워 응하는데 자주 상대가 바뀌므로 그런 얘기가 나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고마웠던 분도 몇 분 꼽았다. 한국에서 주공 주택에 당첨돼 계약금이 필요했는데 월급의 30배나 되는 통장을 주면서 마음대로 쓰라고 했던 숭일중학교 교감선생님이 한 분이고 다른 한 분은  LA에서 충효태권도를 시작할 때 디파짓 2000달러를 내주신 당시 우일여행사 강우봉 사장이다. 이외 행사 때마다 도와준 분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고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아쉬운 일도 있다. 충효태권도장이 잘 될 때에 수익을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 선교 장학금, 선교 헌금 등으로 많이 나눴는데 지난 2010년 작고한 부인이 당시에 "그 중에 조금이라도 가족을 위해서 썼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것이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 또한 한인 사회 행사에는 발 벗고 나서서 참가했지만 두 아들의 학교 행사에는 참석하지 못해서 두 아들이 서운해 한 점이다.     정 관장은 앞으로 못 다한 교회 봉사, 선교 활동에 매진하겠다고 다짐했다. 장병희 기자리얼 시니어 스토리 비즈니스 봉사 봉사 활동 한인 한의사협회장 라팔마 충효태권도

2023-10-15

[리얼 시니어 스토리] "50세가 넘어 민간 군목으로 갔던 이유는"

  "지금은 한인타운이 LA의 손꼽히는 명소 지역이 됐지만 45년 전에는 정말 볼품 없는 거리였습니다. 차이나타운에 비교하기 부끄러운 그렇고 그런 거리였죠. 이렇게 발전하게 된 것은 한국정부도 미국 정부도 아닌 한인들의 힘이었습니다."   한인으로 구성된 경제 단체중에서 가장 오랜 된 곳 중 하나가 바로 '봉제협회'다. 그 중요성이 예전만 못하지만 한때 한인타운.한인사회로 들어오는 2가지 큰 '돈줄'을 시니어들의 웰페어(SSI)와 봉제분야서 벌어오는 자금으로 인정하던 때도 있었다. 지금은 한국에서 자유롭게 집도 팔고 투자도 받고 해서 한인사회에서 한인을 상대로 한 비즈니스가 가능하지만 초창기 한인타운, 올드타이머들은 맨손으로 주류사회에서 돈을 벌어와 한인타운을 먹여 살렸다.   초창기 봉제협회를 이끈 인물중 한 사람이 바로 박철웅 일사회장이다.     1949년생이지만 남들보다 조금 일찍 올드타이머가 된 덕분에 다양한 인생을 살아왔다.   1985년 봉제협회장을 맡았다. 한인 여성들이 '밟아라 삼천리'라는 유행어가 있었듯이 누구나 이민 초기에는 봉제공장에서 포장, 실밥 뜯기 등 뒷일로 시작해 싱글 재봉틀, 오버로크, 커버 스티치까지 배워 돈을 벌었다. 다른 일에 비해서 돈벌이가 나았던 덕분에 한인들은 대졸자도 재봉틀 앞에 앉았다. 원래 손재주가 좋았기에 돈이 몰리자, 시샘하는 정부를 등에 업은 타인종들의 견제가 들어오고 "이러다 안되겠다!" 싶어서 권익단체를 만든게 '봉제협회'다.   박 회장은 그래서 돈도 벌고 권익을 지키기 위해서 협회를 만들었다. 그는 "30대 중반인데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면서 "다운타운 라이온스클럽 회장, 평통위원 등 여러가지 기회가 쏟아져 들어왔다"고 말했다. 상훈도 따라왔다. 제리 브라운 주지사 공로상(1982), LA톰 브래들리 시장 공로상(1985)을 받았다. 협회와 한인 사회를 지키기 위해서 정치인들을 후원했던 덕분이다.   하지만 한인사회와 한인타운은 지켰는데 자신의 비즈니스는 그렇지 못했다.   1994년 대구에서 목사 안수(대한 예수교 장로회 경북노회)를 받았다. 1996년 남가주한인교회 담임 목사가 됐다. 2002년엔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는 신앙 간증집도 냈다.   2005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민간 군목이 됐다. 통일전망대교회와 22사단 새생명교회 담임 목사로 봉사했다. 미국으로 돌아와서는 2011년부터 봉제 및 의류업 사업자들을 돕는 '파커 비즈니스 컨설팅'을 운영했고 2020년 팬데믹을 계기로 은퇴했다.   오전 6시 기상과 함께 3마일을 걷는다. 신문을 보고 아침을 먹고 성경을 1시간 읽는다. 기도하고 평통 출신들을 모아서 만든 일사회 모임을 준비한다. 캠핑에도 진심이어서 계절마다 캘리포니아 구석구석을 누볐다.     부인(1956년생)과 1남 2녀들을 뒀다. 자녀들에게는 신앙생활을 권면한다. 혼란스러운 세상이지만 지속적으로 신앙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한국어 교육을 강조한다. 한글과 한국어를 잘해야 뿌리에 대한 정체성이 확실해진다고 믿고 있다.     1987년 제 4기 평통위원을 역임했고 2009년엔 LA평통 부회장을 맡았던 박 회장이라 세상에 바라는 것은 역시 한국의 미래다. 예전에 비해서 너무 좌우가 분열돼 있고 심지어는 좌우 모두 속에서 또 분열돼 있는 양상이어서 우려스럽다는 것이다. 그는 "통합해야 하는데 그저 말뿐인 것같다"면서 "상대의 생각을 듣고 대화로 공통 분모를 찾아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공통 분모는 조국에 대한 사랑인데 지켜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런 통합의 정신을 기조로 노력하면 결국엔 북한도 변화하고 평화통일도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2010년 통일교재도 집필했다)   "젊은이들이 비전을 갖고 있어도 이끌어 줄 사람, 멘토가 없습니다. 이제 한인사회를 위해서 성공한 선배들이 더 많이 멘토가 되야 합니다."   막상 지나고 보니 후회되는 순간도 있게 마련. 박 회장은 "너무 일찍 성공한 것이 오히려 독이 됐다"면서 "젊어서 또 어려서 그랬지만 너무 일찍 성공에 취했던 것같다"고 말했다. 또 "인생을 길게 보고 큰 뜻을 품고 탄탄하게 세워 부를 쌓아서 도모했어야 했다"며 "세상을 너무 좋아했고 세상을 즐긴 것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후배들을 만나면 뜻을 세우고 현실에 만족하지 말고 앞으로 걸어나가라는 조언을 한다.     인터뷰를 마치려는데 민간 군목으로 갔던 이유를 들었다.     "한국이 선교사를 해외로 많이 파송하는 나라중 하나인데 막상 한국의 농어촌에는 빈 교회가 많습니다. 미자립교회다 보니 목사가 없어서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많습니다."   한편 박 회장은 지난 2008년부터 시작한 중앙일보 오피니언 지면에 연재중인 칼럼 등 그동안 써온 글을 정리해 출간할 예정이다. 장병희 기자리얼 시니어 스토리 민간 군목 초창기 한인타운 민간 군목 한때 한인타운

2023-10-08

[리얼 시니어 스토리] 후배 기업가 돕기 위해 오늘도 치열한 AI공부

"항상 마음에 뒀던 AI공부 시작했는데 잘 익혀서 마음 맞는 후배에게 도움 주고 싶습니다."   UCLA석좌교수 출신 한홍택(1942년생) 박사의 하루는 오전 6시30분에 주식시장과 함께 시작된다. 투자한 주식과 시장의 변동을 주시하며 부인 백훈(1942년생) 여사와 1시간 정도 집 주위를 산책한다. 사는 곳이 산 위에 자리 잡고 있어 산책로로는 제법 경관이 좋다. 오후 1시  주식시장이 끝나면 관리하는 웹사이트를 정리하고, AI를 인터넷으로 공부한다. 마당 손질 등 잡일을 하며 오후를 보낸다. 또 한 달에 4번 줌으로 진행하는 세미나 포럼, 과학기술 포럼, 기업 라운드테이블, 경험을 공유하며 배우는 해피아워(Happy Hour) 등에 참석할 준비를 한다.   한 박사는 "UCLA에서 교수 생활을 할 때도 계속 공부했는데 지금도 공부한다"면서 "예전과 달리 인터넷이 발달돼 공부하는 것이 어렵지 않고 의지만 있으면 무엇이든 찾아서 공부할 수 있는 세상"이라고 말했다.   그는 서울대 기계공학과(60학번) 졸업 후 ROTC 장교로 병역을 마치자마자 미국으로 유학을 왔다. 57년 전의 일이다. 박사 학위를 받고 나서 21년 후인 1992년 남가주로 오는 동안 직장을 6번이나 옮겼다. 한 박사의 미국 생활은 그야말로 이동의 연속이었던 셈이다. 이후에도 2번이나 집을 떠나 임시였긴 하지만 타향살이를 했다. 소위 미국에서 말하는 7년의 근지러움(Seven Year Itch)이 민망할 정도라고 표현했다. 그의 변명은 가능하면 여러 곳에서 살아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고, 또 경력과 가족에게 더 맞는 직장과 도시에서 살려고 했던 것이다.   남가주로 이사 온 후에는 UCLA 기계항공과에서 교수 생활을 했고, 2009년 그동안의 미국 경험을 살려 공헌할 기회가 생겨, 갑자기 한국에 나갔다가 4년 후에 돌아와 2013년 전문직에서 완전히 은퇴하게 됐다. 이 때문에 UCLA에서는 별 준비할 새 없이 조기 은퇴한 셈이다.   "은퇴를 하니 가장 좋은 것은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을 남의 간섭 없이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국립연구소와 대학에서 교육과 연구에 몰두하다가 은퇴하니 그동안 꽁꽁 묻혀 두었던 사업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킬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본인 스스로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을 직접 발휘하기에는 다소 늦었고, 그 대신 간접적으로 마음에 맞는 회사의 주식을 사서 그 회사의 경영을 엿보는 것이 현실적으로 좋겠다고 생각해서 주식 투자를 시작했다.     아울러 항상 흥미는 있었으나 바쁘다는 이유로 미루기만 했던 AI도 인터넷으로 배우기로 결정했고, 비영리 단체를 위해서 웹사이트와 줌을 이용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주식 투자는 앞으로 10년 후의 목표액을 세워 놓고, 얼마 전 시작한 모교와 동창회의 장학 프로그램을 확장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라며 "앞으로도 힘이 있는 한, 집에서 할 수 있다면,  좀 더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AI 공부도 마음에 맞는 후배 기업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수준이 되는 것이고, 웹관리는 계속할 생각이다. 그래서 앞으로 최소한 10년은 건강해야 하니 산책을 규칙적으로 하겠다고 다짐한다.   시애틀에 거주하는 세자녀(혜련, 혜진, 진이)들에게는 자기대로의 꿈을 마음껏 펼치며 남을 배려하고 남과 나누는 삶을 살기 바란다고 전한다. 세상에 대해서는 "인류의 역사는 개인의 자유를 향한 투쟁의 연속인 것 같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독재하에서 신음하는 것을 보면 안타까울 뿐이다. 하루속히 인류 모두가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고마웠던 사람 일, 순간에 대한 질문에는 고마운 분들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다섯분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큰 도움을 줘서 감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에 유학을 오게 해 준 이해 박사, 학위를 받도록 도와주신 버논 뉴버트(Vernon Neubert), 월터 존제미스(Walter Jaunzemis) 지도교수, 전문 분야에서 꿈을 펼치게 해 준 스티븐 차이(Stephen Tsai) 박사, 호암상을 추천해 준 한창대 교수를 꼽았다.     한 박사는 "평범하게 산 인생이라 별로 후회되는 일은 없다"며 "하고자 하는 일이 뜻대로 안 되었을 때에도 그 때문에 배운 것이 있으니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단지 자녀들과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이 아쉽고, 관행을 너무 모르고 한국을 나갔던 것이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한홍택 박사의 약력=경기도 광주 출생, 서울대 기계공학과(1964), 펜스테이트 석박사(1971, 공업역학), 미공군항공재료연구소(1972~1978), 워싱턴대 교수(1979~1986), 펜스테이트 석좌교수(1986~1992), UCLA석좌교수(1992~2009), 삼성호암상 공학부문 수상(1999).  장병희 기자리얼 시니어 스토리 기업가 ai공부 후배 기업가 ucla석좌교수 출신 박사 호암상

2023-09-24

[리얼 시니어 스토리] "100년 넘는 노하우로 '은퇴자 봉사' 돕고 있어요"

  한인사회의 대표적인 성인 봉사단체인 라이온스클럽에는 윌리엄 윤 총재가 있다. 한인 클럽 행사에는 어디에서나 얼굴을 볼 수 있다. 지구 총재를 했던 것도 15년이 지났고 팔순도 넘었지만 클럽을 돕느라고 지치지 않는다고 한다. 팔순이지만 청년 같이 젊은이가 윌리엄 윤 총재다.     한인 사회에는 12개의 한인 라이온스 클럽이 있다. 라이온스 클럽은 국제적인 비영리 봉사단체로 기본 최소 단위는 수십명으로 이뤄진 '클럽'이다. 40년이 넘는 인생의 절반 이상을 라이온스에 헌신한 인물이 바로 윌리엄 윤 총재다. 1942년생인 윤 총재는 2008년 4L3지구(district)의 총재(governor)를 역임해 '윤 총재'로 불린다.   그는 원래 비즈니스를 사고 파는 일을 했지만 이제는 은퇴한 상태로 본업이 라이온스 클럽이 됐다. 그를 소개하는데 라이온스의 조직을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4~5클럽이 모여 존(zone)을 이룬다. 이어서 리전(region)이 20개 정도의 클럽으로 이뤄진다. 그래서 윤 총재가 이끌었던 4L3지구는 62개의 클럽이 소속돼 있다. 이런 지구가 남가주에 15개가 있다. 1976년 입문 이래 이제까지 윤 총재가 관여했던 클럽은 대략 100여 개가 넘는다고 한다. LA올림픽 라이온스 클럽 소속인 그는 로버트 이(타계)씨를 비롯해 서영석, 이응목, 이용기, 추부원 씨 등을 추천했다.   "이렇게 반세기 가깝게 라이온스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비즈니스로 인간관계를 하지 않고 만남을 순수하게 즐길 수 있는 인간 관계가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라이프를 즐겁게 살 수 있는 모임은 라이온스 클럽만 한 것이 없습니다."   한편 비즈니스를 은퇴하면서 달라진 것이 일상이다. 생각도 많이 달라졌다. 그는 심지어 다리를 다쳐서 골프를 그만둔 것도 전화위복이라고 말했다. 등산가 김평식씨를 따라서 트레일을 제대로 배운 덕분에 이제는 부인 리나(1944년생)씨와 시간이 날 때마다 샌게이브리얼 마운틴을 오른다고 한다.   하루 일과도 매우 단순해졌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 운동은 스트레칭과 하루 3마일을 걷는다. 근육 운동은 이제는 무리다. 저녁에는 역시 라이온스 클럽과 관련된 행사에 참석한다. 부르는 곳도 많고 갈 곳도 많다.   윤 총재의 버켓리스트는 역시 라이온스 클럽이다. 그는 "라이온스 활동을 미친 사람처럼 너무 열심히 한다는 얘기를 듣곤 한다"면서 "아무리 열심히 해도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지만 좋아서 한다"고 말했다. 그가 버켓리스트로 올린 라이온스는 무엇일까.     미국에서 한인으로 구성된 디스트릭트(지구)를 만드는 것이다. 지구는 클럽 갯수가 아니고 인원이 중요하다. 대략 1250명 쯤이면 지구를 세울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현실은 가주에서 1000명의 한인을 라이온스로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북가주와 남가주의 현재 인원 200명 보다 4배가 더 늘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 같아 보인다. 비영리 봉사단체가 라이온스 클럽만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총재는 꼭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 시작하고 시도해야 한다고 믿는다. 2019년 국제클럽 회장이었던 최중열 회장과도 공감했던 일이다.   윤 총재는 "지미 카터 대통령도 라이온스 총재 출신으로 대통령도 됐고 임기 후에도 봉사에 큰 힘을 보탰다"며 " 라이온스 클럽도 한인 사회의 성장과 위상 만큼의 규모가 돼야 한다"고 한인 지구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현재는 젊은 라이온스 회원이 그렇게 많지 않지만 그쯤 되면 라이온스 클럽에서 봉사를 제대로 익힌 한인 청년이 정계에도 입문하여 정치인도 되고 빅테크 같은 비즈니스도 일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지나고 보니 220국 140만명의 네트워크를 통해 국제적인 교류와 정보 교환이 가능하고 국제 대회가 열릴 때마다 3만~4만명이 모인다"며 "미국에서의 사회생활이나 인생살이에 큰 도움이 됐다"고 강조했다.   윤 총재는 또한 국제클럽의 스페셜 코디네이터이기도 하다. 일반 단체나 취미 동호회를 상대로 이들에게 라이온스 클럽의 프로그램을 통해 노하우를 전수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100년이 훨씬 넘는 동안 비영리단체로 꾸준히 발전해온 라이온스클럽의 장학생 선발, 불우이웃돕기 같은 봉사활동이 효과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좋게 활용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특히 은퇴자들의 노하우를 활용해 사회 환원 봉사활동을 위한 은퇴자 클럽을 만들면 은퇴를 즐기며 동시에 봉사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자녀 1남1녀에게도 같은 바람이다. 돈이 행복을 만들어 주지 않는데 사람들은 너무 집착한다며 자녀들은 즐기면서 살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세상에 바라는 것은 바로 '주는 마음을 갖고 살자'다. 크고 작건 간에 관계없이 주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흔히 '자기 앞가림을 하고 남으면 준다'는 것보다는 작은 것부터 나누는 열정이 나중에 큰 것도 줄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윤 총재는 2021년 국제라이온스클럽으로부터 '앰배서더오브굿윌' 상을 수상했다. 그는 "은퇴자는 뜻깊은 사회 환원이 필요한데 그 방법으로 지역사회 봉사가 알맞다"면서 "100년 넘는 노하우를 갖고 있는 라이온스 클럽 시스템은 이를 도울 수 있다. 내가 돕겠다"고 밝혔다. 그는 이메일 주소(williamsjyoon@gmail.com)를 남겼다.  장병희 기자리얼 시니어 스토리 노하우 은퇴자 라이온스 클럽 라이온스 총재 한인 라이온스

2023-09-04

[리얼 시니어 스토리] "매주 하루 생태공원서 풀 뽑기로 자연 만끽"

남가주 일대에서 상업용 부동산 브로커로 활약했던 정동익.정정숙 부부의 시니어 라이프도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1942년생인 정씨는 펜데믹으로 은퇴하면서 운영하던 도널드정어소시에이츠의 문을 25년만에 닫고 알리소 비에호 지역으로 이주했다. 하지만 1947년생인 부인 정정숙 여사는 사회활동을 활기차게 하고 있다.     이들 부부 일상의 하일라이트는 매주 새들백처치에 출석해서 9시부터 예배 안내에 나서는 것이다. 11시30분쯤 교회 문을 나서면 진정한 한 주가 시작된다. 봉사라기 보다는 신앙생활의 중요한 부분으로 감사하며 즐겁게 임하고 있다고 전한다.   한 주에 하루씩 거주지 인근에 있는 생태공원에도 나가 흙을 만난다. 정원에 만들 수 있는 텃밭과는 달리 커뮤니티 파크에서 이뤄지는 풀뽑기로 만나는 흙은 도시 출신인 정씨 부부에게도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기회이자 혜택이다. 정씨는 "하루 종일 허리도 못펴고 막노동에 가까운 봉사를 하지만 매우 즐겁다"며 "다른 은퇴자들도 자연과 만나는 시간 갖기를 추천한다"고 말했다.   그는 부인 정정숙 여사를 위해 운전사(?) 역할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1969년부터 시작된 이 역할은 정씨가 무역업 상업용 부동산을 할때나 미주한인재단 LA이사장을 할때도 멈추지 않았다. 은퇴한 이즈음은 오히려 정여사의 코윈 퍼시픽LA 회장 등 사회활동 한국어진흥재단 이사 등 차세대 양성을 돕기 위한 교육활동 참여에도 적극적으로 함께 참여하고 있다.   두 부부가 여러 곳을 여행했지만 이탈리아 로마는 부부가 함께 하기 위해서 남겨놨는데 곧 방문할 계획이다. 은퇴와 팬데믹으로 미뤘던 세계 여행을 올 가을에 드디어 하게 된다.     슬하에는 1남1녀가 있다. 생물학 박사인 아들과 비즈니스 컨설턴트인 딸에게 바람이 있다. 신앙생활에 보다 더 적극적이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 바라는 것은 최근 교육계에서의 논란과 관련 있다. 너무 어린 학생들이 성전환과 관련된 결정을 해야 하는 것 등에 대한 우려다. 이런 논란이 잦아져 평화로운 학교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장병희 기자리얼 시니어 스토리 생태공원 자연 하루 생태공원 정정숙 부부 정씨 부부

2023-08-06

[리얼 시니어 스토리] "이민 첫해 학비 대출이 은행과 첫 인연"

옛말에 '인생에는 (최소) 3번 기회가 있다'는 것이 있다.   첫 한인은행인 한미은행의 박창규 전 이사장(2002-2004)에게는 특히 그런 것 같다. 물론 기회를 잡고 안 잡고는 개인적인 문제지만, 그는 모두 잡았다.   첫 기회는 미국 이민이다. 1941년생인 그는 서울대 약대를 나오고 이민 오자마자 USC약대를 마친 후에 바로 한인타운에 한인이 주인인 첫 약국(올림피아 약국)을 열었다. 지금은 50곳도 넘을 정도로 한국말이 통하는 약국이 많지만 당시에는 한인 약사가 드물어 말이 잘 안 통해 약도 제대로 못 먹던 상황에 구세주 같은 역할을 했다. 문전성시 덕분에 2호점 웨스턴 약국, 3호점 세라노 약국의 문을 열었다.   대략 3번째 기회는 1982년에 왔다.     "어느 날 평소 신뢰가 두터웠던 정원훈씨가 은행을 설립하겠다고 집에 찾아왔어요. 당시엔 한인 자본으로 세운 한인 은행이 없었기 때문에 창립 이사들에겐 모두 큰 모험이었던 셈이죠."   그래서 한미은행 창립 이사가 됐다. 총 500만달러를 조지 최, 안이준, 안성주씨와 모았는데 그중 6%쯤을 투자했다. 지금 되돌아 보면 은행에  투자한 것이 쉬워 보이지만 정 초대 행장을 100% 신뢰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당시에 더 공격적인 부동산 투자나 더 안정적인 금융 상품에 투자했다면 훨씬 더 큰 돈을 벌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한인들에게 친근한 한인은행을 원했다. 한인타운에서 돈을 벌었기에 한인들의 비즈니스를  도울 수 있는 은행을 시작한 것이다. 결과는 "한때 한미은행 너댓번째 개인 주주까지 됐다"고 전한다.   그에게 은행은 또 다른 인연이 있다. 미국에 온 첫 해, USC약대 진학하고 보니 첫 1년 학비 7000달러를 구할 길이 없었다. 크레딧도 없고 어디 붙었는지도 모르는 코리아에서 온 낯선 학생이 약대 학비를 빌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가 지금도 고맙고 감사하는 일이 그때 일어났다. 은행 대출 담당 직원이 그의 얘기를 듣고 학비를 빌려줬다. 코리아에서 온 낯선 학생에게는 매우 기적같은 일이다. 불과 10여 년 후 창립 이사가 된 것도 미국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기적이다.   네번째 기회는 58세 은퇴 후에 왔다. 돈은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 돈 보다 더한 것을 얻었다.   "어려서 이은관의 배뱅이굿, 강옥주의 회심곡을 좋아했다"며 그는 "평생 판소리를 꿈꿨는데 음악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고 말했다. 판소리는 물론, 색소폰과 아코디언을 통해 새로운 기회를 만났다. 취미생활에 그치지 않고 봉사활동으로 이어졌다. 이제는 교회, 양로원까지 공연에 나서고 있다.   이 뿐이 아니다. 미주에 국악을 알리는 것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2013년부터는 후원하는 '미주한국국악경연대회' 대회장을 맡았고 올해 10회 대회는 10월28일에 개최한다. 또 고원기념 사업회를 설립해 고원문학상을 제정하는 등 문화 사업에도 힘을 쏟으며 보람을 얻고 있다.   박 전 이사장은 "그 옛날 대출 담당 직원을 찾아 보은하고 싶다"며 "그때 학비 대출 덕분에 한인 은행을 만드는 데 힘을 보탰다는 것을 알면 매우 좋아할 것"이라고 말했다.     장병희 기자리얼 시니어 스토리 이민 첫해 한인은행인 한미은행 은행 대출 한미은행 창립

2023-07-23

[리얼 시니어 스토리] 시니어는 못해? 아니, 뭐든 할 수 있어!

많은 사람이 시니어라는 시간을 나이가 너무 많아서 아무 것도 못할 때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이런 역발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명곡 오페라 아카데미라는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이다.     명곡 오페라 아카데미(음악감독 에스더 진)가 오는 16일(일)에 제7회 정기 음악회를 한인타운내 미주평안교회(담임 임승진 목사)에서 개최한다. 소프라노 에스더 진 감독의 제자 그룹중 시니어 19명이 무대에 선다. 가곡과 오페라 아리아 등이 연주된다. 아카데미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연습실이 6개월간 폐쇄된 기간을 제외하고는 계속 실력을 연마해 왔다.     이번 음악회 출연자중 최고령자는 80대 중반의 권영자(소프라노)씨이고 가장 젊은 나이는 65세다. 모든 출연자는 은퇴한 시니어다. 시니어라고 아마추어나 취미생활만은 아니다. 상당수는 명문대 출신의 고학력자들로 어려서부터 성악을 전공하고 싶었으나 시대를 잘못 만난 탓으로 성악보다는 먹고 살기 위한 직업에 종사했다. 배우고 전공하고 싶었으나 이민까지 오다 보니, 자녀들 시집, 장가 다 보내고 찾은 '내 길'이다. 젊어서 의사로 활약했지만 이제는 성악가가 된 경우, 평생을 교회 성가대로 활동하며 아쉬워했던 사람도 있다.     에스더 진(한글명 복일) 감독은 "하고 싶었던 것을 할 수 있는 것 말고도 이점이 있다"며 "복식 호흡법으로 발성연습을 하면서 폐기능이 좋아지고 이로 인해 더 건강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 무대에는 얼마나 연습해야 오를 수 있을까.     우선 주 1회 90분의 연습이 기본이고 개인적인 노력이 조금 보태지면 5~6개월을 잡는다. 연중 무대를 위한 연습에 나선다. 무엇이든 목표(음악회)가 있어야 실력이 늘어나는 것이 이치이기 때문이다. 기초부터 차근차근 시간을 두고 배웠다. 음악이론, 박자, 음정 등을 다시 익혔다.   이번 무대에는 20명이 무대에 오르기 때문에 한 곡 씩만 부르고 중창, 합창도 있다. 출연자로는 권영자(님이 오시는지), 최복희(동심초), 신정혜(천년의 약속), 안선신(선구자), 송성신(비목), 이정민(사공의 노래), 최혜숙(추심), 방원준(제비), 백인원(성불사의 밤), 나주옥(Lascia chio pianga), 소냐 리(O mio babbino caro), 한복남(O del mio amato ben), 전숙녀(Ich lieb dich), 안성주(Nessun dorma), 장치훈(Torna a surriento), 최명철(Non ti scordar di me), 허몽(N'appari tutti amor), 천병규(Donna non vidi mai), 최명식(Ideal) 등이다. 이외 게스트로 테너 박병운(그리운 금강산)이 나선다. 합창곡으로는 영원한 사랑, 친구이야기, 오솔레미오가 연주된다.   음악감독 진씨는 노스캐롤라이나스쿨오브아츠를 졸업하고 맨해튼스쿨오브뮤직 출신으로 오페라 코시판튜티, 디자우벨플로테, 마담버터플라이, 라카딸리나 등에 주역으로 출연했고 다수 콩쿠르에서 수상했다. 또한 음반도 3개를 출간한 바 있다. 반주는 피아니스트 CJ리가 맡는다.     ▶장소: 미주평안교회(170 Bimini Place LA CA)     ▶일시: 2023년7월16일(일) 오후4시     ▶문의: (213)605-5810     장병희 기자 saramco.rbc@gmail.com리얼 시니어 스토리 시니어 아카데미 시니어 19명 음악감독 에스더 소프라노 에스더

2023-07-09

[리얼 시니어 스토리] "장수촌엔 확실히 비법 있더라"

한인 타운에서 소문난 여행 애호가 이하성.이형숙씨 부부가 최근 파키스탄 장수촌 훈자밸리를  25일간 다녀왔다. 이들은 이미 '여행에 미친 닥터 부부'를 3권이나 출간한 여행작가 부부이기도 하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하성씨는 소아과 전문의로 은퇴할 때까지 수 천 한인 어린이들의 건강을 책임지기도 했다.     1942년생인 이 씨는 1968년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해군 군의관으로 국군수도통합병원 서울분원 소아과 과장을 거쳐 1976년 미국에 왔고 1979년 이하성 소아과를 개업해 35년을 채우고 2014년에 은퇴했다.   수많은 일화가 있겠지만 가톨릭 신자에서 37세에 제칠일 안식교로 개종했기에 다른 소아과 클리닉과 달리 토요일에 문을 닫고 일요일에 병원 문을 열었다. 이런 '일요 진료' 덕분에 토요일에도 일을 하느라 자녀를 돌보기 어려웠던 한인 부모와 소아들에게 훌륭한 진료를 제공했다. 그래서 당시 한인 타운은 주7일 소아과 진료가 가능한 곳이었다.     이하성 전문의는 1971년 결혼해 슬하에 2남1녀를 뒀다. 이들 부부는 여행을 매우 좋아했다. 특히 남극을 비롯해 주로 오지 여행을 다녔다. 이들의 여행은 파키스탄 장수촌의 25일처럼 장기간 현지에 머물며 샅샅이 살펴보는 여행으로 장남이 국무부 소속 외교관의사(RMO)로 활동 중인 세네갈에서는 무려 2개월을 머물기도 했다. 올해로 은퇴 10년이 되면서 이들 부부가 틈틈이 방문한 곳이 결국 100곳에 이르게 됐다.   오지 전문 여행가 부부다 보니 누구든 해외 여행이라면 가장 먼저 가야 하는 곳을 가보지 못한 곳이 있다고 전한다. 바로 영국, 프랑스, 호주, 뉴질랜드, 아이슬란드다. 이 전문의는 "나이 먹어도 편히 갈 수 있는 곳이라 일부러 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현재의 일상은 다른 은퇴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LA북쪽 레오나 밸리라는 도심에서 멀어진 '오지'로 2019년에 이사해 공작새 한 쌍과 60마리의 닭을 키우고 있다. 자연을 200% 즐기는 전원 생활이다. 그는 아침 기상 후 2마일을 걷고 성경을 읽고 필사에 나선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닭에게 모이를 주고 서예에 정진하고 있다. 전에 살던 패서디나에서 멀리 이사한 것은 2016년 받은 장기 이식 수술 때문에 면역력이 약해진 이유다. 코로나19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였지만 현재는 풍광과 공기가 좋아 자유로움을 마음껏 즐기고 있다.   버켓리스트로는 앞으로 가지 않았던 곳을 여행해야 하겠지만 성경을 읽기와 전도를 꼽았다. 자녀들에게는 불쌍한 사람들을 돕고 참된 신앙인으로, 참된 크리스천이기를 바란다고도 전했다.   세상에 바라는 것은 그의 일생을 관통하는 봉사와 자비를 비춰 보는 것같다. 그는 배고픔에 울부짖는 북한 어린이를 위해 한국 지인들과 함께 분유보내기 운동도 미주에서 주도했던 바, 대한민국이 분열되지 않고 자유 민주로 평화 통일이 되기를 바라며 세계 온난화 현상과 코로나19같은 질병,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이 사라지는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으로 회복돼야 한다고 밝혔다. 참, 건강하려면 음식 조심(소식), 하루 30분 유산소 운동을 꼽았다. 장병희 기자리얼 시니어 스토리 장수촌 이하성 여행작가 부부 파키스탄 장수촌 소아과 전문의

2023-07-02

[리얼 시니어 스토리] "70대 중반이지만 아직도 현역 사범"

"역시 나이는 그저 숫자일 뿐, 무도인에게 은퇴란 없습니다."   세계 태권도계의 대모 김영숙(9단) 관장은 70대 중반임에도 현역으로 밸리 위넥타지역에서 '월드 태권도 아카데미'라는 태권도장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매일 유아반과 성인반을 직접 지도하고 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의 부지런함과 꾸준함에 있다. 요즘도 매일 아침 저녁으로 개인 훈련에 힘을 쏟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지금도 앞차기를 하면 성인 머리 꼭대기까지 발을 뻗을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아직도 현역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태권도계의 대모라 불리우는 이유도 선 후배간의 솔선수범과 신망 덕분이다. 최근에는 OC한인회 주최 시니어 셀프디펜스 행사에 강사로 참석해 한인 시니어들에게 자기 방어의 기본을 전수하기도 했다.   4월에는 아주사 퍼시픽 대학에서 열린 태권도 챔피언십에서 진행됐던 '단체 품새 시연'을 리드했다. 후배인 캘리포니아주 연합 태권도협회(CUTA)의 임진기 전 회장이 대회 중 참가 선수 1000명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시연 리더로 선배인 김 관장에게 간절히 부탁해 이뤄진 일이다. 이날 선수와 심판 등 1000명이 훨씬 넘는 태권도인들이 동시에 태권도 품새인 태극 1장을 펼쳐 화제가 됐던 순간의 주인공이었다.   사실 김 관장이 유명해졌던 것은 2000년 7월6일부터 사흘간 개최했던 제1회 국제여성오픈태권도대회 때문이다. 158개국에서 모인 여성 태권도 선수들이 참가해 LA메모리얼 스포츠 아레나에서 개최된 대회를 김 관장이 주도했고 성공적으로 개최해 태권도인이라면 김 관장을 모르는 이가 없게 됐다.     그는 "이제는 널리 전파돼 태권도가 대결 기술로서는 물론 무도로서 어떤 무술보다도 몸과 정신 건강에 좋다는 것을 누구나 알게 돼 큰 보람"이라면서 "전성기 때 만큼은 아니지만 도복을 입고 제자를 가르치는 동안에는 현역으로 자기 연마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자녀들에 대한 바람은 두 딸이 모두 태권도인이고 미국 국가대표 코치까지 했던 터라 아쉬움은 없다. 하지만 세상에 바라는 것은 있다. 태권도 1세대, 혹은 2세대가 세상에 태권도를 전파하기 위해서 피땀 흘린 역사에 대해서 너무 쉽게 잊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태권도를 지키기 위해서 많은 고초를 겪은 김운용 전 IOC위원의 업적이 그렇다"며 "초창기 5대 문파부터 국제태권도연맹(ITF)와 세계 태권도협회(WTA)에 이르기까지 해외에서 고생하며 태권도를 지킨 선배들의 스토리가 빨리 정리돼 남겨져야 한다"고 밝혔다. 장병희 기자리얼 시니어 스토리 중반 현역 현역 사범 세계 태권도협회 세계 태권도계

2023-05-29

[리얼 시니어 스토리] 찍고 쓰고 마이크 들고 자문하고

한인사회에서 상법 변호사로 수십년째 활동하고 있는 김지영 변호사의 버켓 리스트는 글을 쓰는 것이다. 궁극의 주제도 정해져 있다. 인도 명문가 출신 '구마라지바'에 관한 것이다. 이름도 낯선 구마라지바는 신장지역 쿠차국 출신으로 서기 4세기 승려이자 저술가로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을 한자로 번역한 것으로 유명하며, 이 작업은 불교 보급에 공헌했을 뿐 아니라 불교 교파인 삼론종, 성실종의 기초가 됐다.   김 변호사는 구마라지바의 대단한 업적, 그의 삶과 세계에 관한 책을 쓸 계획이다. 불교 용어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구마라지바의 번역 덕분에 발전한 반야경에 나오는 교리라는 점에서 저작의 깊은 의도를 엿볼 수 있다.   1951년생인 김 변호사는 "학교를 1년 먼저 입학하는 바람에 평생을 모임에서 가장 어린 멤버였는데 어느 날 보니 가장 나이 많은 사람이 됐다"면서 "변호사 일을 줄이고 매달 4번의 줌 강연에 나서면서 매우 바쁘게 시니어의 삶을 살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와중에도 1년에 4~5번은 한국을 방문한다. 93세인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것인데 7~10일 방문하고 돌아오면 몸 상태의 정상 회복이 힘들다며 한국행이 쉽지 않음을 아쉬워했다.  사진 찍기를 즐겨온 덕분에 최근에 그룹전에도 참가했는데 모르는 사람이 그의 작품을 구입해 가 스스로 매우 고무됐고 또한 이제는 더 이상의 아마추어 작가가 아닌 프로페셔널 사진작가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전했다.   그의 나이가 마무리 할 때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새로운 시도에도 발을 담그고 있다. 요즘 한국에서 유행하는 '디카시'(사진에 5행시를 넣는 작품) 작업도 하고 있다. 그는 5행시 대신 시조를 넣고 있다.   궁극적인 버켓리스트 실현을 위해서 직업상 완전한 폐업은 불가능하기에 법률가로서의 일을 줄여 구마라지바가 탄생한 신장으로 취재 여행을 갈 생각이다.     슬하의 1남1녀에게는 "미국인으로 미국사회에 공헌해야 하지만 한국인인 것을 잊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세상에 바라는 것은 "자기 중심적인 삶을 통해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서 남의 것을 뺏는 모습을 많이 봤다"면서 "결국 안 좋았다"고 말했다. 집착해봐야 얻는 것은 궁극적으로 손해더라는 메시지다.     한편 김 변호사가 매월 한차례 강사로 나서는 영문학 강의(그는 학부에서 영어를 전공했다)는 내일(23일) 오후 7시 줌(891 5830 1622, 040179)을 통해서 누구나 참여해 볼 수 있다. 이번 주제는 영국의 시인이며 화가인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로 1700년대 영국 사회를 들여다 볼 수 있게 된다. 장병희 기자리얼 시니어 스토리 마이크 자문 김지영 변호사 상법 변호사 버켓리스트 실현

2023-05-21

[리얼 시니어 스토리] "새로운 것도 반갑게 받아들여야"

"무엇이든 거부하지 않고 하려고 합니다."   대외적인 직함은 한국외대 GCEO과정 운영위원장 본업은 40년 역사의 건강보조식품 회사를 남편과 함께 운영중인 '여사장님'이다. 바로 테레사 황씨다. 굳이 염색을 하지 않았지만 젊게 보여 70대 초반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60대 말로 보는게 맞을 듯하다. 사실 GCEO과정에 대한 애착이 엄청나게 커서 본업은 이제 운영위원장이라고 볼 수 있다. 과정 자체가 이제는 원우회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어서 외대 경영대학원의 LA분교인 셈이다.     지난해에는 한국 카이스트에서 개설한 고급 과정(인공지능 경영자과정) 수업을 온라인으로 들었다.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AI(인공지능)에 대한 수업이다. 일단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하는 습관 때문에 프로그램을 무사히 마쳤다. 시간대가 한국과 미국이 달라서 공부하는데 애를 먹었다. 하지만 결과가 좋아서 오는 25일 졸업식 참석을 위해 한국으로 출국한다.     올해 챗GPT를 비롯해 AI이미지산업이 터져 나오며 AI가 불붙듯이 유행할 줄 몰랐던 사람들이 대부분이기에 황씨의 선견지명에 절로 감탄이 나온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또 다른 공부 길이 열리는 것처럼 보인다.   역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이다. 많은 사람이 하던 사업도 그만두고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데 주저하기 십상인데 황씨는 20대나 30대같이 새로운 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마치 긍정의 아이콘 같다. 앞만 보며 40년간 일했으니 여행도 많이 못갔을 것같은데 그렇지 않았다. 비즈니스 시작이래 전세계를 상대로 수출에 나서다 보니 안 가본 나라가 별로 없다. 빙하는 물론 오로라도 봤다. 버켓리스트에 여행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이유다.     황씨의 또 다른 비밀은 에그아티스트라는 것이다. 굳이 한국어로 표현한다면 '알공예가'다. 돌만큼 딱딱한 타조알을 베이스로 그 위에 온갖 재료로 채색하고 재료를 붙이면 예술 작품이 탄생한다. 비즈니스 사무실 한쪽 방을 작업실로 만들어 작품이 가득차 있다. 개인전도 여러 번 가졌다. 아랍에미레이트에서 작품전을 계획하고 있다.   "결혼한지 53주년이 됐지만 삶이 지루하지 않았던 것은 새로운 것을 거부하지 않았던 성격 덕분입니다. 일만 하면서 살지 않았던 것도 감사합니다."   너무 순탄하게 살았다고? 미국에 온 한인 시니어 중 순탄하게 살았던 사람이 어디에 있나. 이민 왔다는 사실만 해도 스트레스 지수 최고인 사건이다. 그것을 지혜롭게 이겨낸 것이 한인 시니어들의 역량이다. 황씨도 그 중 한사람으로 스트레스와 역경은 누구나와 다를 바 없다.   이제 황씨는 시니어답게 은퇴 계획도 세워보고 이전부터 해오던 무료 건강세미나에도 힘차게 도울 계획이다.     마지막으로 리얼 시니어 스토리에서 물어보는 몇 마디가 있다. 자녀들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두 딸이 남편을 잘 보살피고 화목한 가정을 지속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무엇을 바랄까. 총기 규제를 꼽았다. 장병희 기자리얼 시니어 스토리 운영위원장 테레사 한인 시니어들 한국외대 gceo과정 인공지능 경영자과정

2023-03-12

[리얼 시니어 스토리] "전쟁 없는 세상이 될 수 없을까"

지난 38년간 팜스프링스 인근 코첼라 밸리지역에서 세탁업소를 운영해온 강상욱(77)씨는 딱히 특별한 은퇴 계획이 없다. 15명의 생계는 물론 종업원을 거느리며 연간 12만 벌의 의류를 세탁하면서 쌓아놓은 고객들과의 약속과 신뢰 때문이다. 언뜻 들으면 '공자왈 맹자왈' 같은 전형적인 모범답안 같지만 들어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시니어가 됐다고 무조건 은퇴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동안 부었던 소셜연금을 꼭 받아야 하는 법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코첼라 밸리는 코첼라 뮤직 페스티벌이 열려서 아주 유명해진 지역이지만 원래는 부유층의 피한지다. 그래서 세탁업의 피크철은 11월부터 그 다음해 5월 무렵까지로 숨 쉴새 없이 바쁘다. 덕분에 6월부터10월까지 쉬어왔다. 긴 시간 동안 서부의 캠핑장은 안가본 곳이 없을 정도고 알래스카는 물론 유럽에도 5번, 러시아에도 2번 다녀왔다. 그래서인지 버켓리스트의 80%를 성취했다고 생각한다. 코첼라라는 사막에서 잘 버텨 생존에 성공(?)했고 두 자녀를 대학원까지 모두 남부럽지 않게 공부시켰으니 그렇다. 다만 남극과 호주.뉴질랜드를 못 가봤다. 강씨가 휴가를 갈 수 있는 시간(6~10월)이 남반구인 그곳은 한 겨울이기 때문이다.   팬데믹 때는 어땠을까. 에센셜 비즈니스라서 닫지 않았다. 그런데 고객이 전혀 줄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밖으로 다니지 못해서 옷을 세탁할 필요는 없지만 대신 집에 있는 갖가지 물품을 세탁해야 했기 때문이라 바빴다.   '사막의 수필가'라 부를 수 있는 그는 시니어가 되면서 글쓰기도 달라졌다고 전한다.     "이전에는 앞만 보고 뒤를 안봤죠. 그런데 이제는 앞보다는 뒤도 돌아보고 반추하게 됐습니다."   덕분에 이전보다 정제된 글을 쓰게 됐다고 덧붙였다.예전에는 젊은 혈기로 세상을 바꾸려고 애썼지만 이제는 세상을 이해하는 지혜를 갖게 됐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자신이 계획을 세웠고 실천했으므로 책임도 자신이 진다. 다만 "그때 내가 최선을 다했나"하는 고민은 있다.   그래도 80을 앞두고 있는데 비즈니스를 언제까지 계속할 수는 없다. 선배들이 85세쯤에 약해지고 90쯤에 타계하는 모습을 봐왔기에 그렇다. 고객들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쉽게 팔지 못하고 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이제까지 가졌던 평판을 유지하며 스무드하게 넘겨주고 싶다'는 것이다.   이 코너의 마무리는 강씨가 세상에 바라는 것을 물으며 마친다.   "서로 미워하고 살지 말고 전쟁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전쟁 첫 주에 아버지를 공산군에 잃었던 그는 인천으로 피난을 갔다가 마침 병원에 숨어 있었다고 한다. 당시 들려왔던 비명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듯 하다고. 지옥 그 자체였다고. 그래서 '전쟁이 없는 세상', '서로 사랑하며 살기에도 인생은 짧다'고 덧붙였다. 장병희 기자리얼 시니어 스토리 전쟁 자영업 에센셜 비즈니스 은퇴 계획 뮤직 페스티벌

2023-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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